서론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도리이들이 만든 터널을 걸으면서 정말 신들의 세계로 향하는 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햇살이 도리이 사이로 스며들어 만드는 붉은 그림자들이 신비로웠다. 도리이마다 적힌 한자들을 보니까 개인이나 회사에서 기증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경건해졌다.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이 생각보다 험했지만, 중간중간 나타나는 작은 신사들과 여우 석상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2시간 넘게 걸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소원이 정말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쌀의 신에서 상업의 신으로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역사는 무려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11년 이곳에 처음 신사가 세워질 때는 이나리 신이 농업의 신, 특히 쌀의 신으로 여겨졌다. 이나리(稻荷)라는 글자 자체가 '벼가 자라는 곳'이라는 뜻이다. 농업이 일본 사회의 기반이던 시절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나리 신의 역할도 변했다. 헤이안 시대부터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나리 신이 장사의 신, 돈의 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쌀이 화폐 역할을 했던 시절이라 쌀의 신이 곧 부의 신이 된 것이다. 지금도 일본 전국의 사업가들이 사업 번창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상인들 사이에서 이나리 신앙이 폭발적으로 퍼졌다. 장사가 잘 되면 감사의 표시로 도리이를 기증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처럼 수많은 도리이들이 산 전체를 뒤덮게 된 것이다. 각각의 도리이가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1만 개의 도리이가 만든 붉은 터널
후시미 이나리 신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센본 도리이다. 센본은 '천 개'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1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나리야마 전체에 걸쳐 도리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서 정확한 개수를 세기도 어렵다.
도리이의 붉은색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붉은색은 일본에서 생명력과 마력을 상징하는 색이다. 또 악귀를 쫓는 효과도 있다고 믿어진다. 수천 개의 붉은 도리이가 만든 터널을 지나가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화 의식인 셈이다. 실제로 걸어보면 신성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도리이를 기증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가장 작은 도리이도 수십만원이고, 큰 것은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증 신청이 계속 밀려들어서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이나리 신에 대한 믿음이 깊다는 증거다.
여우, 신의 메신저가 되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 곳곳에는 여우 석상들이 가득하다. 입에 열쇠나 구슬, 쌀 이삭을 물고 있는 여우들을 볼 수 있다. 이 여우들은 이나리 신의 사자(使者) 역할을 한다고 믿어진다. 사람들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다.
왜 하필 여우일까? 일본에서 여우는 영리하고 신비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또 농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여우가 쥐를 잡아먹어서 농작물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업의 신인 이나리 신의 사자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사 곳곳에 있는 여우 석상들은 모두 표정이 다르다. 온순해 보이는 것도 있고, 위엄 있어 보이는 것도 있다. 어떤 건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나하나 자세히 보는 재미가 있다. 아이들은 여우 석상들을 보면서 신기해한다. 무서운 신이 아니라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나리 신사의 매력이다.
이나리야마 등반, 2시간의 신성한 여행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진짜 매력은 이나리야마 전체를 오르는 등반에 있다. 해발 233미터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도리이 터널을 따라 오르는 길이 정말 신비롭다. 중간중간 작은 신사들과 휴게소들이 있어서 쉬면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구간은 오쿠샤 입구부터 시작되는 센본 도리이다. 이곳부터는 정말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좁은 산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도리이들. 마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다. 특히 햇살이 도리이 사이로 스며들 때는 정말 환상적이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대략 2-3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여러 갈래길이 나오는데, 어느 길을 택해도 결국 정상에서 만난다. 각 길마다 다른 풍경과 다른 신사들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교토 시내 전경도 정말 아름답다.
오모카루이시, 소원의 무게를 재다
오쿠샤 근처에는 오모카루이시라는 신기한 돌이 있다. 소원을 빌고 돌을 들어 올렸을 때 예상보다 가볍게 느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반대로 무겁게 느껴지면 소원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해보니까 정말 신기했다. 처음에는 "그냥 돌인데 뭐가 달라지겠어" 했는데, 막상 소원을 빌고 들어보니까 평소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물론 심리적인 효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런 체험형 요소들이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매력이다. 단순히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래서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특히 많이 찾는다.
24시간 열린 신들의 집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24시간 개방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부분 신사들이 해가 지면 문을 닫는데, 이곳은 언제든 갈 수 있다. 특히 새벽이나 밤에 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새벽에 가면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조용하다. 도리이 터널을 혼자 걸으면서 명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분위기가 정말 신성하다. 사진작가들은 이런 시간대를 노려서 온다.
밤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도리이들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산길이라 완전히 어둡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혼자서는 위험할 수 있고, 손전등이나 휴대폰 플래시는 필수다.
외국인들이 사랑하는 일본 문화의 상징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트립어드바이저 같은 사이트에서 교토 관광명소 1위를 차지할 정도다. 금각사나 청수사보다도 인기가 높다. 그 이유는 아마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이런 신사 문화가 정말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종교 공간이기 때문이다. 수천 개의 도리이가 만든 터널은 그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SNS에 올리기에도 정말 좋은 배경이다.
아시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한국이나 중국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잘 보존된 곳은 드물다. 특히 도리이 터널을 걸으면서 찍는 사진들이 인스타그램에서 인기 폭발이다. 일본 여행의 필수 인증샷 장소가 되었다.
상업화의 그림자
하지만 관광지화가 진행되면서 문제점들도 생겼다. 가장 큰 문제는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주말이나 연휴에는 도리이 터널이 사람들로 꽉 찬다. 조용히 참배하기 어려울 정도다. 본래의 신성한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있다.
상업적인 요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신사 주변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상술들이 눈에 띈다. 전통적인 신사의 모습보다는 관광지의 모습이 더 강해지고 있다. 진정한 신앙의 장소인지 관광 상품인지 애매해지고 있다.
환경 문제도 심각하다. 하루에 수만 명이 드나들면서 산길이 많이 훼손되고 있다. 쓰레기 문제도 있고, 도리이에 낙서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사 측에서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현대인들의 소원,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13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업 번창, 돈 벌이, 건강, 사랑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같다. 현대의 사업가들이 스마트폰으로 소원을 빌면서도 마음은 옛날 상인들과 다르지 않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코로나19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이 어려워진 사람들이 이나리 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여전히 신에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습이 흥미롭다.
젊은 세대들도 많이 온다. 취업, 연애, 시험 등을 위해 소원을 빈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신에게 의탁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축제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봄에는 벚꽃이 피어서 붉은 도리이와 분홍 벚꽃이 조화를 이룬다. 여름에는 푸른 녹음 속에서 도리이의 붉은색이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가을에는 단풍과 어우러져 정말 환상적인 풍경을 만든다. 겨울에는 눈 덮인 도리이들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1월 1일 신정에는 하츠모데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새해 첫 참배를 하러 온 사람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선다. 이때는 정말 장관이다.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새해 소원을 빈다. 일본인들의 신앙심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2월에는 이나리 축제가 열린다. 전통 음악과 춤 공연이 펼쳐지고, 특별한 기도 의식도 진행된다. 이때는 평소보다 더 신성한 분위기가 난다. 관광객들도 일본 전통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보면서 느낀 건 종교의 힘이었다. 13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온 이곳에는 정말 특별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안을 받고 희망을 얻어간다. 붉은 도리이들이 만든 터널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인간의 염원이 만든 기적 같은 공간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신들과 인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