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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탄(와이탄): 동양과 서양이 만나 빚어낸 상하이의 영원한 로맨스

no1fellow 2025. 6. 23. 07:41

와이탄
와이탄

서론

황푸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외탄의 첫인상은 정말 강렬했다. 왼쪽으로는 100년 전 서구 열강들이 지은 웅장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21세기 중국의 상징인 푸둥 마천루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특히 저녁 무렵 석양이 질 때의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 건너편 동방명주탑과 상하이타워가 화려한 조명으로 물들면서 물에 비친 모습까지 더해져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었다. 외탄을 걸으면서 "이게 바로 상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곳은 세계에서도 드물 것 같았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밤에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되어서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줬다.

황푸강변 갯벌에서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외탄(外灘)이라는 이름 자체가 상하이의 역사를 말해준다. '바깥쪽 강변'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황푸강변의 갯벌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곳은 어부들이 그물을 말리고 짐을 내리는 평범한 강변이었다. 상하이 시내에서 봤을 때 강 바깥쪽에 있어서 외탄이라고 불렸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가 개항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서구 열강들이 조계지를 설치하면서 외탄은 중국과 서구를 잇는 관문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의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은행과 상사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20세기 초가 되면서 외탄은 '동양의 월가'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했다. 아시아 최대의 금융 중심지였고, 세계 경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상하이는 런던, 뉴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도시였다. 외탄은 그 상징적인 장소였다.

52개 건물이 들려주는 건축사 이야기

현재 외탄에는 52개의 역사적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각각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이 건물들을 보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구 건축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네오클래식, 아르데코, 고딕 리바이벌, 르네상스 등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건 12번 건물인 상하이 푸동발전은행이다. 1923년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홍콩상하이은행 상하이 지점이었다. 돔형 천장의 모자이크 벽화가 정말 아름답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 건물로 불렸다고 한다.

23번 건물인 중국은행은 중국인이 설계한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다. 1937년 완공된 이 건물은 서구 건축 기법에 중국 전통 요소를 가미한 독특한 스타일이다. 지붕 처마의 곡선이나 장식 문양에서 중국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조계지 시대의 영광과 모순

외탄의 화려한 건물들은 조계지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모순도 드러낸다. 이 건물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중국에서 벌어들인 부로 지어진 것들이다. 아편 무역, 불평등 조약, 치외법권 등으로 얻은 이익이 이런 웅장한 건축물로 변한 것이다.

당시 외탄은 철저히 서구인들만의 공간이었다. 중국인들은 출입이 제한되었고, 화원공원(현재의 황푸공원)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푯말까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차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 상하이는 중국 근대화의 선봉지 역할을 했다. 서구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고, 새로운 사상과 기술이 전파된 곳이었다. 외탄은 그런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국인들에게는 굴욕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1949년 해방과 사회주의 시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외탄도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외국 자본가들은 모두 떠났고, 그들의 건물은 중국 정부나 국영기업이 접수했다. 화려했던 금융 중심지는 사회주의 사무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외탄은 제국주의의 잔재로 여겨져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문화대혁명 때는 일부 건물의 서구적 장식들이 파괴되거나 가려지기도 했다. 상하이 시민들에게 외탄은 굴욕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았다. 건물 자체는 실용적으로 활용되었고, 강변 산책로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았다. 정치적으로는 민감한 공간이었지만, 일상적으로는 사랑받는 장소였다.

개혁개방과 함께 돌아온 국제도시의 꿈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외탄에 대한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의 굴욕보다는 국제화의 경험으로 재평가되었다. 상하이가 다시 국제도시가 되려면 외탄의 경험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외탄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건물들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 강변 산책로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특히 1990년 푸둥 신구 개발이 시작되면서 외탄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1999년에는 강변 산책로를 확장하고 지하 상가도 만들었다.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구경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시설도 설치했다. 동시에 역사적 건물들의 보존에도 더욱 신경을 썼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인정하면서도 그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노력이었다.

푸둥과의 대화, 과거와 미래의 만남

외탄의 진짜 변화는 푸둥 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1990년 황푸강 건너편 농지였던 푸둥이 신금융지구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30년 만에 그곳에는 세계적인 마천루들이 들어섰다. 동방명주탑, 상하이타워, 상하이월드파이낸셜센터 등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이제 외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100년 전 서구 건물들 너머로 21세기 중국의 상징인 초고층 빌딩들이 보인다. 과거와 미래가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모습이다. 이런 대비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해가 지면 양쪽 건물들이 모두 화려한 조명으로 물든다. 외탄의 고전적인 조명과 푸둥의 현대적인 LED가 어우러져서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 야경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관광 명소에서 문화 공간으로

21세기 들어 외탄은 단순한 관광 명소를 넘어서 문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적 건물들이 박물관, 갤러리, 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상하이 근대사를 다룬 전시관들이 많이 생겼다.

3번 건물인 상하이 유니언빌딩은 현재 고급 쇼핑몰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옛 건물의 웅장함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편의를 제공한다. 6번 건물인 중국통상은행 건물은 상하이의 금융사를 다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 고급 호텔들도 들어서고 있다. 페어몬트 피스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 상하이 등이 역사적 건물을 활용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00년 전 서구 귀족들이 누렸던 럭셔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상하이 시민들의 일상 속 외탄

관광객들에게는 구경거리지만, 상하이 시민들에게 외탄은 일상 속 휴식 공간이다. 매일 아침 태극권을 하는 어르신들, 저녁에 산책하는 가족들, 주말에 데이트하는 연인들로 북적인다. 특히 여름 저녁에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상하이 사람들에게 외탄은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친구나 친척이 상하이에 오면 가장 먼저 외탄을 보여준다. "우리 상하이가 이렇게 멋있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굴욕의 역사였지만, 이제는 국제도시 상하이의 상징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인스타그램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야경을 배경으로 한 셀카는 상하이 여행의 필수 인증샷이다. 웨딩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아서 주말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혼부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코로나19와 새로운 도전

2020년 코로나19로 외탄도 큰 변화를 겪었다. 해외 관광객이 사라지면서 평소 북적이던 강변이 한산해졌다. 하지만 국내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국인들이 외탄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디지털 혁신도 가속화되었다. QR 코드를 통한 무접촉 안내 서비스, 가상현실을 활용한 역사 체험 등이 도입되었다. 100년 된 건물들이 첨단 기술과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게 되었다.

또 지속가능한 관광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과도한 관광객으로 인한 건물 손상을 방지하고, 환경 친화적인 관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역사 보존과 관광 개발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

상하이시는 외탄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035년까지 외탄을 세계적인 문화 관광 명소로 만들겠다는 비전이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 비즈니스가 어우러진 복합 공간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특히 문화 콘텐츠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상하이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을 제작하고, 외탄을 배경으로 한 문화 행사도 늘리고 있다.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매력을 동시에 높이려는 전략이다.

환경 개선에도 투자하고 있다. 강변 녹지를 확대하고, 대기 질을 개선하며, 보행자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고 있다. 100년 전 만들어진 공간을 21세기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다.

동서양 문명의 만남터

외탄의 가장 큰 매력은 동서양 문명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서구의 고전 건축과 중국의 현대적 발전이 하나의 풍경 안에 공존한다. 이런 조화는 상하이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또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100년 전 제국주의 시대의 건물들이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다.

앞으로도 외탄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본질적 매력인 다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적 깊이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이 특별한 공간은 상하이의 영원한 자산이 될 것이다.

외탄을 걸으면서 느낀 건 역사의 복잡함과 도시의 생명력이었다. 한때는 굴욕의 상징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자부심의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상하이 사람들이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서 성숙함을 느꼈다.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런 공간은 세계에서도 정말 드물 것 같다. 10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이 독특한 풍경이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