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왓포사원에 들어서는 순간 화려함에 압도당했다. 수많은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금박으로 덮인 불상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하지만 정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와불전에서 만난 거대한 와불이었다. 길이 46미터, 높이 15미터의 황금빛 와불이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이 정말 경이로웠다. 특히 발바닥에 새겨진 108개의 나전 장식을 보면서 태국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에 감탄했다. 사원 곳곳에서 들려오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와 향 냄새가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태국 전통마사지를 받으러 온 관광객들도 많았는데, 마사지를 받고 나니 정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곳이 태국 전통마사지의 발상지라는 게 새삼 실감났다. 왕궁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왕궁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태국 불교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유타야 시대부터 이어진 400년 역사
왓포사원(Wat Pho)의 정식 명칭은 '왓 프라체투폰 위몬망클라람'이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788년이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오래되었다. 16세기 아유타야 왕조 시대에 이미 이 자리에 작은 사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왓 포타람'이었는데, 이것이 현재 '왓포'라는 줄임말의 어원이 되었다.
현재의 왓포사원은 라마 1세(짜끄리 왕조 창시자)가 1788년 방콕에 새 수도를 정하면서 대대적으로 재건한 것이다. 왕궁 건설과 함께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왕조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라마 1세는 아유타야 시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고자 했고, 왓포사원이 그 중심 역할을 했다.
라마 3세(1824-1851) 시대에는 더욱 대규모 확장이 이뤄졌다. 현재 우리가 보는 거대한 와불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라마 3세는 학문과 예술을 중시했는데, 왓포사원을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교육과 의료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곳은 '태국 최초의 대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길이 46미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와불
왓포사원의 가장 유명한 보물은 역시 거대한 와불이다. 길이 46미터, 높이 15미터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와불이다. 부처가 열반에 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온하고 자비로운 표정이 인상적이다. 전체가 금박으로 덮여 있어서 은은한 황금빛을 발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발바닥 장식이다. 발바닥에는 108개의 길상문(吉祥文)이 나전으로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이 108개의 문양은 모두 부처의 32상 80종호를 나타내는 상징들이다. 연꽃, 코끼리, 원숭이, 호랑이 등 다양한 동식물과 기하학적 무늬들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와불 제작에는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먼저 벽돌과 회반죽으로 거대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석고로 세부를 조각했다. 마지막에 금박을 입혀서 완성했다. 당시 기술로는 정말 놀라운 작업이었다. 지금도 150년이 넘었는데도 금박이 벗겨지지 않고 찬란한 빛을 유지하고 있다.
1,000여 개 불상의 장관, 불교 박물관
왓포사원에는 와불 외에도 1,000개가 넘는 불상이 있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사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불교 박물관 같다. 각 불상마다 고유한 의미와 이야기가 있어서 천천히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본당에 있는 주불상이다. 높이 4미터의 청동 불상인데, 아유타야 시대의 작품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좌대 아래에는 라마 1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서 왕실 사원으로서의 격을 보여준다.
사원 곳곳에는 중국 양식의 석상들도 많다. 특히 문지기 역할을 하는 거대한 야차(야크사) 상들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사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지는데, 무서운 표정과 달리 액막이 역할을 한다고 믿어진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사진을 찍는 포토 스팟이기도 하다.
91개 첨탑이 만드는 하늘의 숲
왓포사원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것은 91개의 첨탑(체디)들이다. 높이도 색깔도 모두 다른 이 첨탑들이 어우러져서 정말 장관을 이룬다. 가장 높은 첨탑은 41미터에 달하고, 작은 것들은 10미터 정도다. 각각 다른 시대에 만들어져서 태국 건축사의 변천을 보여준다.
첨탑들은 크게 네 종류로 나뉜다. 왕들의 유골을 모신 왕실 첨탑,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승려 첨탑, 불경을 보관하는 경전 첨탑, 그리고 장식용 첨탑들이다. 각각 다른 색깔과 장식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멀리서 봐도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가장 화려한 것은 라마 1세의 유골을 모신 주 첨탑이다. 금박과 색유리로 장식되어 있어서 햇살을 받으면 무지개처럼 반짝인다. 이 첨탑 주변에는 작은 첨탑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왕을 호위하는 신하들 같다.
태국 전통마사지의 발상지
왓포사원은 태국 전통마사지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라마 3세 시대에 이곳에서 전통의학과 마사지 기법이 체계화되었다. 사원 벽면에는 인체의 경혈과 마사지 방법을 그린 도표들이 새겨져 있어서 살아있는 의학 교과서 역할을 했다.
현재도 왓포사원 내에는 전통마사지 학교와 치료원이 운영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태국 마사지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첫 번째 목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왓포에서 발급하는 수료증은 태국 마사지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격증으로 인정받는다.
관광객들도 사원 내 마사지 센터에서 정통 태국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승려들이 직접 가르친 전통 기법으로 마사지를 해주는데, 일반 마사지샵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종교적 공간에서 받는 마사지라서 치유의 효과도 더 크게 느껴진다.
살아있는 박물관, 벽화와 조각의 보고
왓포사원은 태국 전통 예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사원 곳곳의 벽화들은 태국 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본당 내부의 벽화는 부처의 일생과 자타카(전생담)를 그린 것으로, 18세기 태국 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벽화에는 당시 태국 사회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왕족과 귀족들의 복장, 서민들의 일상생활, 외국 상인들의 모습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중국인, 인도인, 유럽인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 방콕이 얼마나 국제적인 도시였는지 알 수 있다.
조각 예술도 뛰어나다. 문기둥과 처마에 새겨진 나가(용) 조각들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특히 본당 입구의 문지기 조각상들은 근육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라마 왕조의 권위와 종교적 정통성
왓포사원은 짜끄리 왕조(라마 왕조)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라마 1세가 방콕에 새 수도를 정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왕궁과 왓포사원 건설이었다. 이는 왕권의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라마 1세부터 라마 4세까지 4대에 걸친 왕들의 유골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이는 왓포사원이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왕실의 영묘 역할도 한다는 의미다. 태국 사람들에게는 가장 신성한 공간 중 하나로 여겨진다.
현재도 왕실의 중요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린다. 특히 새 왕이 즉위할 때 왓포사원에서 특별 법회를 열어서 불교계의 승인을 받는 의식을 거친다. 태국이 불교 국가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일상 속 신앙, 태국인들의 마음의 고향
관광객들에게는 구경거리지만, 태국 사람들에게 왓포사원은 일상적인 신앙 공간이다.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현지인들이 찾아와서 참배하고 공덕을 쌓는다. 특히 아침 일찍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태국 불교의 살아있는 전통을 보여준다.
태국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왓포사원을 찾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축복을 받으러 오고, 시험이나 취업을 앞두고는 성공을 기원한다. 결혼 전에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고, 사업을 시작할 때는 번창을 위해 기도한다.
특히 음력 보름날이나 불교 명절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몰려든다. 이때는 사원 전체가 연꽃등과 향으로 가득 차서 정말 신성한 분위기가 된다. 관광객들도 이런 날에 가면 진짜 태국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왕궁과 차오프라야강이 만드는 황금 삼각지대
왓포사원의 위치도 특별하다. 왕궁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차오프라야강이 흐른다. 이 세 곳을 묶어서 방콕의 '황금 삼각지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관계다.
왕궁에서 왓포사원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다. 왕궁의 화려함을 본 후 왓포사원의 경건함을 느끼는 코스가 인기다. 차오프라야강에서는 롱테일 보트를 타고 강변 사원들을 돌아보는 투어도 할 수 있다. 물 위에서 바라보는 왓포사원의 모습도 또 다른 매력이다.
특히 일몰 시간대에 차오프라야강에서 바라보는 왓포사원은 정말 아름답다. 91개 첨탑들이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강변에서 대기한다.
관광지화의 딜레마와 전통 보존
왓포사원은 연간 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태국 최고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다. 너무 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조용한 참배 분위기가 사라지고, 상업적 색채가 강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특히 와불전은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여서 진정한 명상이나 기도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원 측에서는 입장객 수를 조절하고, 참배 예절을 교육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왓포사원은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여전히 200여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일상적인 종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새벽과 저녁 예불은 빠짐없이 진행되고, 전통 불교 교육도 계속되고 있다.
태국 마사지 세계화의 거점
최근 왓포사원은 태국 마사지의 세계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태국 마사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왓포사원의 마사지 학교도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다. 매년 수십 개국에서 학생들이 찾아온다.
왓포 마사지 스쿨에서는 전통 기법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이론도 함께 가르친다. 해부학, 생리학 등 과학적 지식과 전통 경혈 이론을 결합해서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한다. 이렇게 배출된 마사지사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태국 마사지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또 왓포사원은 태국 전통의학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전통 약초 요법, 물리치료, 정신 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현대 의학과 전통 의학을 접목하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
왓포사원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문화재 보존과 교육에 힘쓰고 있다. VR 기술로 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AI 가이드를 도입해서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환경 친화적인 관리에도 신경쓰고 있다. 태양열 발전 시설을 도입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400년 된 사원이 21세기 환경 문제에도 적극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젊은 세대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늘리고 있다. 불교 문화 체험, 명상 교실, 전통 예술 워크숍 등을 통해 젊은이들이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SNS를 활용한 홍보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왓포사원을 둘러보면서 느낀 건 종교와 문화,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거대한 와불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경건한 모습과 마사지를 받으며 힐링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태국 불교의 포용력이자 왓포사원만의 특별함이 아닐까 싶었다. 종교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공간, 학습의 공간, 문화 체험의 공간이 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면서도 계속 새로운 역할을 찾아가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