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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 파리 시민들이 혐오했던 철골 덩어리가 사랑받는 상징이 되기까지

no1fellow 2025. 6. 11. 20:49

에펠탑
에펠탑

서론

파리에서 에펠탑을 처음 봤을 때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가 더 멋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밤에 조명이 켜진 모습을 보니까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지 알겠더라. 특히 매시 정각에 반짝이는 조명이 켜질 때는 정말 예뻤다. 하지만 이 탑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파리 시민들이 엄청 싫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국박람회를 위한 임시 건축물

에펠탑이 지어진 이유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행사였는데, 뭔가 특별한 상징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모전을 열었고, 구스타브 에펠의 설계가 선정되었다.

원래 에펠탑은 20년 후에 철거할 예정이었다. 임시 건축물이었던 셈이다. 높이 300미터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긴 했지만, 박람회가 끝나면 없앨 계획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일이었다.

구스타브 에펠은 이미 자유의 여신상 내부 골격을 설계한 유명한 엔지니어였다. 철골 구조 전문가였는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에펠탑도 그의 철골 기술의 집대성이었다.

파리 시민들의 엄청난 반발

에펠탑 건설이 발표되자 파리가 난리났다. 특히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파리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망치는 흉물"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파리는 고전적인 건축물들로 유명했는데, 갑자기 철골 덩어리가 들어선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 기 드 모파상은 "에펠탑이 보기 싫어서 에펠탑 안 레스토랑에서만 식사한다"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에펠탑 안에서는 에펠탑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했다는 건데, 정말 싫어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300명의 예술가들이 연명으로 반대 서명을 하기도 했다. "파리에 이런 괴물 같은 건축물을 세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보면 정말 웃긴 일이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2년 2개월의 건설 과정

반대가 심했지만 공사는 계속되었다. 1887년 1월에 시작해서 1889년 3월에 완공되었으니까 2년 2개월 걸린 셈이다. 당시로서는 정말 빠른 속도였다. 요즘도 이 정도 규모 건물 지으려면 몇 년은 걸리는데 대단하다.

건설 과정에서 사고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건설 현장에서는 사고가 많았는데, 에펠탑 공사에서는 단 한 명만 죽었다고 한다. 그것도 휴일에 술 먹고 와서 떨어진 거라고 하니 안전 관리가 정말 잘 되었던 것 같다.

철골 부품들을 미리 공장에서 만들어서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을 썼다. 이것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레고 조립하듯이 정확하게 맞춰서 만들었다고 한다.

박람회는 대성공, 하지만 여전한 논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대성공이었다. 6개월 동안 3,20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에펠탑에도 200만 명이 올라갔다. 당시에는 엘리베이터가 완전하지 않아서 대부분 걸어서 올라갔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힘들다.

그런데 박람회가 끝나도 에펠탑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리의 얼굴에 난 상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20년 후 철거 예정이라는 소식에 오히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계속 몰려들었다. 특히 외국인들이 에펠탑을 좋아했다. 파리 하면 에펠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싫어도 어느새 파리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철거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다

1909년이 되자 약속대로 에펠탑을 철거해야 할 시점이 왔다. 그런데 이때 에펠탑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선통신 때문이었다. 에펠탑이 안테나 역할을 하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1차 대전 때는 독일군의 무선 신호를 감지하는 데 에펠탑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에펠탑이 프랑스를 구했다"는 말도 나왔다. 좀 과장된 것 같지만, 어쨌든 군사적으로도 유용했던 건 맞다.

그 후로는 아무도 에펠탑 철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느새 파리 시민들도 에펠탑에 익숙해졌고, 관광 수입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임시 건축물이 영구 건축물이 된 셈이다.

세계 대전을 겪으며 더욱 상징적이 되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도 에펠탑은 중요한 상징이었다. 히틀러가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은 것도 유명하다. 파리를 정복했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프랑스 저항군들이 에펠탑 엘리베이터를 고장내서 히틀러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는 이야기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다. 작은 저항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파리가 해방되었을 때는 에펠탑에 프랑스 국기가 걸렸다. 그 순간 에펠탑은 완전히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더 이상 흉물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 된 것이다.

관광 명소에서 사랑의 상징까지

전후 에펠탑은 점점 더 유명해졌다. 특히 1960년대부터 파리가 로맨틱한 도시로 알려지면서 에펠탑도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에서 파리 장면이 나오면 거의 무조건 에펠탑이 나온다.

한국에서도 에펠탑은 특별한 의미다. 신혼여행이나 프러포즈 장소로 인기가 많다. 실제로 가보면 커플들이 정말 많다. 밤에 조명 켜질 때는 분위기가 확실히 로맨틱하다.

요즘은 매년 700만 명이 에펠탑을 방문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유료 관광지라고 하는데, 정말 대단하다. 처음에 그렇게 싫어했던 파리 시민들도 지금은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테러와 안전 문제

최근 몇 년간 에펠탑 주변에 테러 방지를 위한 방탄 유리벽을 설치했다.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보안이 정말 강화되었다. 가보면 경찰들이 총을 들고 순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좀 무서운 분위기다.

또 소매치기도 정말 많다고 들었다. 관광객들이 사진 찍느라 정신없을 때 가방을 뜯어간다고 한다. 실제로 가봤을 때도 주의하라는 안내방송이 계속 나왔다.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좀 안 맞는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에펠탑을 보러 온다. 위험하다고 해서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만큼 에펠탑의 매력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에펠탑

요즘 에펠탑은 SNS에서도 인기다. 인스타그램에서 에펠탑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수백만 개의 사진이 나온다. 특히 한국 관광객들이 올리는 사진들이 정말 많다. 에펠탑 앞에서 인증샷 찍는 건 거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야경 사진이 특히 인기다. 매시 정각마다 5분간 반짝이는 조명이 켜지는데, 그 순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몰린다. 나도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었는데, 정말 예뻤다.

코로나19 때는 에펠탑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때 사진들을 보니까 텅 빈 에펠탑이 좀 쓸쓸해 보였다. 역시 사람이 많아야 제 맛인 것 같다.

여전히 논란은 계속된다

지금도 에펠탑을 싫어하는 파리 시민들이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 때문에 너무 시끄럽다는 불만도 있고, 주변 상권이 바뀌어서 생활하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있다. 유명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환경 문제도 있다. 에펠탑을 유지하려면 계속 페인트칠을 해야 하는데, 이게 환경에 안 좋다고 한다. 또 밤에 조명을 계속 켜놓는 것도 에너지 낭비라는 지적이 있다.

그래도 에펠탑 없는 파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흉물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파리의 얼굴이 되었다. 사람들의 인식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에펠탑을 보면서 느낀 건 시간의 힘이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반대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에펠탑은 그런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