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암스테르담에서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들어갔을 때 마음이 정말 무거웠다. 책으로만 읽었던 안네 프랑크 일기의 현장을 직접 보니까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며 "정말 여기서 8명이 2년 넘게 숨어 살았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책장 뒤에 숨겨진 입구를 봤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한 소녀가 꿈과 희망을 담은 일기를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평범한 독일 유대인 가족의 암스테르담 이주
안네 프랑크 가족의 이야기는 1933년 독일에서 시작된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은행업을 하던 평범한 사업가였다. 그런데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가족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당시 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피난왔다. 네덜란드는 자유롭고 관용적인 나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오토는 암스테르담에서 펙틴(잼 만들 때 쓰는 재료) 사업을 시작했고, 가족들은 새로운 터전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안네는 1929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4살 때 암스테르담으로 왔으니까 사실상 네덜란드에서 자란 셈이다. 네덜란드어도 잘했고 친구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냥 평범한 소녀였는데, 전쟁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1940년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1940년 5월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네덜란드군은 5일 만에 항복했고, 나치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점차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노란 별을 달고 다녀야 했고, 공원이나 수영장, 극장 출입이 금지되었다. 유대인 아이들은 유대인 학교로만 가야 했다. 안네도 몬테소리 학교에서 유대인 중등학교로 전학해야 했다. 11살 소녀에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었을 것이다.
194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을 동유럽의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노동을 위한 재배치"라고 했지만 사실은 학살이 목적이었다. 안네 가족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은신처 '비밀별관' 준비
오토 프랑크는 이미 1942년 초부터 은신처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회사 건물인 프린센그라흐트 263번지 뒤쪽에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회사 직원들 중 몇 명이 이 비밀을 알고 도와주기로 했다.
도움을 준 사람들은 빅토르 쿠글러, 요하네스 클라이만, 미프 히스, 벱 포스크위엘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유대인 가족들을 숨겨줬다. 당시 유대인을 도우면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었는데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밀별관은 회사 건물 뒤쪽 2-3층에 있었다. 입구는 회전하는 책장으로 숨겨져 있었다. 지금 가보면 정말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다. 모르고 보면 그냥 책장인데, 돌리면 문이 나타난다.
25개월간의 은신 생활
1942년 7월 6일부터 안네 가족의 은신 생활이 시작되었다. 안네 프랑크 가족 4명과 반 펠스 가족 3명, 그리고 치과의사 프리츠 프페퍼까지 총 8명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살았다. 25개월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실제로 그 공간에 가보니까 정말 좁았다. 8명이 어떻게 여기서 살았나 싶을 정도로. 낮에는 아래쪽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조용히 해야 했고, 밤에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기침도 조심해야 했다.
음식은 도우미들이 가져다줬는데, 전시 중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배급표를 위조해서 음식을 사오거나 암시장에서 구해와야 했다. 도우미들도 정말 위험한 일을 한 셈이다.
안네의 일기,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13세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안네는 숨겨진 생활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단순한 일상 기록이 아니라 한 소녀의 성장과 꿈,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 좁은 다락방에서 이런 글을 썼다는 게 정말 놀랍다.
안네는 일기에서 "나는 여전히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선하다고 믿는다"고 썼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들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15살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일기를 보면 안네도 평범한 사춘기 소녀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고, 첫사랑을 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 작가가 되고 싶어했고, 전쟁이 끝나면 학교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런 소소한 일상들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1944년 8월 4일, 체포되다
1944년 8월 4일 금요일 오전 10시경, 독일 보안경찰과 네덜란드 경찰이 들이닥쳤다. 누군가가 신고한 것이었다. 25개월간의 은신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8명 모두와 도우미 두 명이 체포되었다.
누가 신고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돈을 받고 신고했을 수도 있고, 우연히 발각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최악의 날이었다.
체포된 후 이들은 네덜란드의 베스테르보르크 통과수용소로 보내졌다. 그 후 1944년 9월 3일 마지막 열차편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019명이 탄 그 열차는 사흘간 달려서 지옥 같은 곳에 도착했다.
8명 중 오토만 살아남다
아우슈비츠에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었다. 오토는 남자 막사로, 안네와 마르고트, 어머니 에디트는 여자 막사로 갔다. 이때가 오토가 가족을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다.
1944년 10월 소련군이 접근하자 여자들은 다시 독일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은 아우슈비츠보다도 더 열악한 곳이었다. 음식도 부족하고 위생상태도 최악이었다.
1945년 2월 안네와 마르고트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해방을 불과 몇 주 앞둔 시점이었다. 안네는 15살, 마르고트는 19살이었다. 어머니 에디트도 1945년 1월 굶주림과 병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8명 중 오토 프랑크만이 살아남았다.
일기의 발견과 출간
전쟁이 끝나고 오토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을 때 도우미였던 미프 히스가 안네의 일기를 전해줬다. 체포 당일 바닥에 흩어진 일기를 주워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미프가 없었다면 안네의 일기는 영영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오토는 일기를 읽기가 힘들어했다고 한다. 딸의 마지막 생각들이 너무 생생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네가 일기에서 "나는 죽은 후에도 살아가고 싶다"고 썼던 것을 기억하며 출간을 결심했다.
1947년 네덜란드에서 처음 출간된 후 전 세계로 번역되었다. 지금까지 7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3천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홀로코스트를 알리는 가장 중요한 증언 중 하나가 되었다.
1957년 박물관이 되다
1950년대 건물주가 프린센그라흐트 263번지를 철거하려고 했다. 그때 시민들이 나서서 보존 운동을 벌였다. 결국 1957년 안네 프랑크 재단이 설립되고 1960년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지금 가보면 비밀별관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구는 거의 없지만 벽에 붙인 영화배우 사진이나 안네가 그린 낙서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매년 1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예약 없이는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다. 안네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와서 역사를 배우고 생각해보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현재도 계속되는 교육적 역할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인권 교육의 중심지다. 홀로코스트뿐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혐오 문제도 다룬다. 안네의 메시지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다. 왜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어떻게 차별에 맞서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안네의 일기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온라인 교육도 활발하다. 코로나19 때는 가상 투어를 만들어서 전 세계 학생들이 집에서도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견학할 수 있게 했다. 기술의 힘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
한국 사람들에게 안네 프랑크 이야기는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일제강점기라는 유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홀로코스트와 일제강점기는 다르지만, 외침을 받고 고통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는 한국 관광객들이 정말 많이 온다. 안네의 일기도 한국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청소년 필독서로도 인기가 높다. 아마 우리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더 공감하는 것 같다.
안네가 꿈꿨던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한국 학생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안네의 모습에서 희망을 찾는 것 같다.
지금도 울려 퍼지는 안네의 목소리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나오면서 마음이 정말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잔인함에 절망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네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희망을 느꼈다. 그리고 미프 히스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안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15살에 죽은 소녀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나는 죽은 후에도 살아가고 싶다"는 안네의 소망이 정말 이루어진 셈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도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이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