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런던에서 빅벤을 처음 봤을 때는 생각보다 작다는 느낌이었다. 사진에서 보면 엄청 큰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서 그렇게 압도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계 종소리를 직접 들으니까 왜 영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지 알겠더라. 그 웅장한 종소리가 런던 전체에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정각에 울리는 '빅벤 차임'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화재 때문에 다시 지어진 국회의사당
빅벤이 지어진 배경은 좀 드라마틱하다. 1834년 10월 16일 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큰 불이 났다. 궁전 안에서 나무 막대기를 태우다가 불이 번진 건데, 하필 그 나무 막대기들이 옛날 세금 징수 기록이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 기록들을 태워서 없애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화재로 국회의사당이 거의 다 타버렸다. 웨스트민스터 홀 같은 몇 개 건물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한 일이었다. 영국 의회 역사 800년의 흔적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셈이니까.
그래서 새로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시계탑도 함께 건설하게 되었다. 찰스 배리라는 건축가가 전체 설계를 하고, 오거스터스 퓨진이 내부 디자인을 담당했다. 고딕 리바이벌 스타일로 지었는데, 지금 봐도 정말 웅장하다.
빅벤이라는 이름의 진짜 주인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데, 사실 빅벤은 시계탑 이름이 아니다. 탑 안에 있는 가장 큰 종의 이름이 빅벤이다. 시계탑 정식 이름은 '엘리자베스 타워'다. 2012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빅벤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당시 공사 책임자였던 벤자민 홀 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유명한 복서 벤자민 카운트의 별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느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벤자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빅벤 종의 무게는 13.7톤이다. 정말 무거운데, 이걸 96미터 높이까지 어떻게 올렸는지 궁금하다. 1859년에 설치되었으니까 160년 넘게 런던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완벽주의자들이 만든 정밀한 시계
빅벤 시계의 정확도는 정말 대단하다. 1초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시계 제작을 맡은 에드먼드 덴트라는 사람이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는 "영국 최고의 시계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킨 것 같다.
시계 바늘의 크기도 엄청나다. 분침이 4.2미터, 시침이 2.7미터다. 이런 큰 바늘을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기술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무게도 시침이 300킬로그램, 분침이 100킬로그램이나 된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시계 조정 방법이다. 시계가 느려지면 동전을 올려놓고, 빨라지면 동전을 빼는 방식으로 조정한다고 한다. 옛날 방식인데 지금도 그렇게 한다니 신기하다. 하루에 2초 이내 오차를 유지한다고 하니 정말 정확하다.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은 시계
빅벤의 대단한 점은 전쟁 중에도 거의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계속 시간을 알려줬다. 2차 대전 때는 독일 폭격기들이 런던을 폭격했는데, 빅벤도 몇 번 맞았지만 시계는 계속 작동했다고 한다.
1941년 5월 독일 폭격으로 시계탑이 손상되었을 때도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영국인들에게는 정말 상징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런던이 폭격당해도 빅벤은 여전히 똑딱거리고 있다는 건 영국이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였으니까.
흥미로운 건 전쟁 중에는 종소리를 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군에게 위치를 알려줄 수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시계는 작동했지만 소리는 안 냈던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종소리가 울렸을 때 런던 시민들이 얼마나 기뻤을까.
BBC와 함께 유명해진 시계 소리
빅벤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BBC 때문이다. 1924년부터 BBC 라디오에서 새해 첫 종소리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매년 12월 31일 밤 12시가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빅벤 종소리를 듣는다.
2차 대전 중에는 BBC 월드 서비스에서 빅벤 종소리를 내보냈다. 나치 점령지역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빅벤 종소리가 들리면 "영국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요즘도 중요한 순간에는 빅벤 종소리가 나온다. 왕실 결혼식이나 장례식, 중요한 국가 행사 때 항상 빅벤이 등장한다. 영국인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소리인 것 같다.
관광객들과 공사 현장
평소에는 빅벤 주변이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서 빅벤과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지만. 특히 해질 무렵 노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예쁘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은 공사 중이어서 가림막으로 덮여 있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대규모 보수 공사를 했다고 한다. 160년 된 건물이니까 당연히 수리가 필요했겠지만, 관광객들 입장에서는 좀 아쉬웠을 것이다.
공사 비용이 8천만 파운드나 들었다고 한다. 한국 돈으로 1,300억 원 정도다. 정말 많은 돈이지만 영국 상징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투자였을 것이다. 이제 공사가 끝나서 다시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국 민주주의의 상징
빅벤이 단순한 시계탑이 아닌 이유는 국회의사당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 민주주의 국가다. 웨스트민스터에서 800년 넘게 의회가 열리고 있다.
빅벤은 그런 영국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시계탑 꼭대기에는 의회가 열릴 때만 켜지는 등불이 있다. '애스턴 라이트'라고 부르는데, 이게 켜져 있으면 의회가 열리고 있다는 뜻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다.
브렉시트 때도 빅벤 주변에서 많은 시위가 있었다. 찬성파와 반대파가 모여서 자기 주장을 펼쳤는데, 빅벤이 그 배경이 되었다. 영국 민주주의의 상징 앞에서 민주적 토론이 벌어진 거다.
코로나와 여왕의 죽음을 알린 종소리
최근 몇 년간 빅벤은 특별한 순간들을 알려줬다. 2020년 1월 31일 브렉시트가 발효될 때도 빅벤이 울렸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는 역사적 순간을 알린 것이다.
2022년 9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돌아가셨을 때도 빅벤이 특별한 역할을 했다. 1분마다 한 번씩 96번 울려서 여왕의 96세 나이를 기렸다고 한다. 그 종소리를 들은 영국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중에는 NHS(국민보건서비스) 의료진들을 위해 특별히 종을 울리기도 했다. 평소에는 정해진 시간에만 울리는데,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울린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시계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빅벤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빅벤 종소리는 영국인들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빅벤은 변함없이 시간을 알려준다. 160년 넘게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변화가 빠른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일관성은 소중하다.
관광객들에게도 빅벤은 특별하다. 런던 하면 빅벤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런던 아이나 타워 브리지도 유명하지만, 빅벤만큼 상징적인 건 없는 것 같다.
빅벤을 보면서 느낀 건 전통의 힘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전통적인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소중해진다는 것이다. 빅벤이 바로 그런 예인 것 같다. 디지털 시계가 흔한 시대에도 기계식 시계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