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베를린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이게 그 유명한 문인가?" 싶었다. 생각보다 크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석조 건물 같았다. 하지만 가이드가 이 문 앞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걸 들으니까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나폴레옹이 지나간 곳, 히틀러가 퍼레이드한 곳, 베를린 장벽으로 막혔던 곳, 그리고 독일 통일을 축하한 곳. 정말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켜본 문이었다.
프러시아 왕의 개선문으로 시작
브란덴부르크 문은 1791년에 완성되었다.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만든 개선문이었는데, 전쟁에서 이긴 걸 기념하려고 지은 게 아니라 평화를 상징하려고 지었다고 한다. 좀 특이하다. 보통 개선문은 승리를 자랑하려고 짓는데 말이다.
건축가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가 설계했는데, 그리스 아테네의 프로필라이아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12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5개의 통로를 만든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다. 위에 있는 4두마차 조각상이 정말 인상적인데,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4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다.
원래 이름은 '평화의 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참 아이러니해서, 이 문은 오히려 전쟁과 분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 되었으니 정말 파란만장한 운명이다.
나폴레옹에게 빼앗긴 승리의 여신
브란덴부르크 문의 첫 번째 큰 시련은 1806년 나폴레옹의 베를린 점령이었다. 나폴레옹이 이 문을 통해 베를린에 입성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나보다. 문 위에 있던 4두마차 조각상을 통째로 프랑스로 가져가버렸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네 도시 상징을 적국에 빼앗긴 셈이니까. 프러시아 사람들은 얼마나 분했을까. 다행히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4두마차가 다시 돌아왔다. 그때 베를린 시민들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간다.
이때부터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는 철십자 훈장을 들고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작은 변화지만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다.
히틀러의 퍼레이드 무대가 되다
20세기 들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다시 한 번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나치의 상징적인 장소가 된 것이다. 수많은 나치 집회와 퍼레이드가 이곳에서 열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도 이곳이 주요 무대였다. 나치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러운 역사지만, 당시에는 많은 독일인들이 열광했다고 한다.
2차 대전 말기에는 베를린 시가전 때 심하게 손상되기도 했다.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브란덴부르크 문도 총탄 자국과 포탄 흔적이 남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베를린 장벽에 갇힌 고립의 상징
전후 가장 슬픈 시기는 1961년부터 1989년까지였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이 동서독 사이에 갇혀버린 것이다. 아무도 통과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 되어버렸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원래 평화를 상징하려고 만든 문이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독 사람들은 장벽 너머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바라보며 통일을 꿈꿨을 것이다. 동독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이 시기 브란덴부르크 문은 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분단의 아픔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서독 정치인들이 연설할 때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저 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의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레이건의 유명한 연설 무대
1987년 6월 12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장벽을 허물어주십시오!"라는 그 유명한 연설 말이다. 당시에는 그냥 정치적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2년 후 정말로 장벽이 무너졌다.
그 연설을 TV로 본 동독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장벽 철거를 요구하는 걸 보면서 혹시 정말 가능한 일일까 하는 희망을 가졌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 후 동독 내부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레이건의 연설은 냉전 종료의 신호탄 같은 역할을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또 다시 역사의 무대가 된 순간이었다. 이 문은 정말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하는 것 같다.
1989년 통일의 환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28년 만에 자유롭게 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감동적인 장면들을 영상으로 봤는데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동독 사람들이 망치와 정으로 장벽을 부수고, 서독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하는 모습. 가족들이 다시 만나서 포옹하고 우는 모습. 브란덴부르크 문은 그 모든 감동의 중심에 있었다.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12월 22일에는 공식적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다시 열렸다. 28년 만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날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통일 독일의 상징이 되다
통일 후 브란덴부르크 문은 새로운 독일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 정부는 이 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베를린을 건설했다. 국회의사당도 가까운 곳에 있고, 홀로코스트 기념관도 근처에 만들었다.
2002년에는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했다. 전쟁과 분단 시절에 입은 손상을 모두 복구하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 4두마차 조각상도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200년 넘은 건물을 이렇게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독일 통일의 상징이자 유럽 통합의 상징이기도 하다. EU 정상회의나 중요한 국제 행사가 있을 때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상징이 된 셈이다.
관광 명소가 된 현재
지금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최고의 관광 명소다.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나도 가봤는데 정말 사람이 많았다. 특히 아시아 관광객들이 엄청 많더라. 다들 사진 찍느라 바빴다.
문 앞 파리저 플라츠 광장은 항상 북적인다. 거리 예술가들도 많고, 기념품 파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를 표시한 선도 있어서 관광객들이 그 위에서 사진을 찍는다.
야경도 정말 예쁘다. 밤에 조명이 켜지면 정말 웅장해 보인다. 낮에 봤을 때는 그저 그랬는데 밤에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조명의 힘이 크다.
축제와 행사의 중심지
브란덴부르크 문은 각종 축제와 행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새해 전야제에는 수십만 명이 모여서 새해를 맞는다. 2006년 FIFA 월드컵 때는 독일 대표팀 응원 장소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환경 관련 시위나 평화 집회도 자주 열린다. 과거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은 곳이라서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장소인 셈이다.
코로나19 때는 여기서도 마스크 착용 의무화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장소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희망
브란덴부르크 문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독일인들의 회복력이었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서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바로 그런 독일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특히 동독 출신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28년 동안 갈 수 없었던 곳을 이제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그 감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국도 분단국가라서 그런지 브란덴부르크 문이 더 와닿았다. 언젠가 우리도 통일이 되면 이런 상징적인 장소가 생길까. 판문점이나 DMZ가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통일의 기쁨을 상징하는 곳으로 말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혜, 절망과 희망, 분열과 화합의 역사가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고 의미 있는 것 같다. 베를린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